아르센 벵거는 아스날을 22년간 이끈 전설적인 감독으로, 단순한 전술가를 넘어 축구 철학자라 불릴 만큼 깊이 있는 전술 변화를 주도한 인물입니다. 그의 전술 변화는 단순한 포메이션의 전환을 넘어, 시대에 맞춘 축구의 방향성과 철학의 반영이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벵거의 포메이션 변천사와 각 시기별 특징, 그리고 EPL의 변화 속에서 그가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초기 아스날(1996~2004): 4-4-2로 시작된 포메이션
아르센 벵거가 1996년 아스날의 감독으로 부임했을 당시, 프리미어리그는 전통적인 영국식 4-4-2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벵거는 기존의 단순하고 직선적인 스타일이 아닌, 프랑스식 기술 축구와 유럽 전술을 접목시키며 변화의 물결을 일으켰습니다. 초기 벵거의 아스날은 4-4-2를 기본으로 하되, 중원에서의 기술적 플레이와 빠른 측면 역습이 특징이었습니다. 특히 패트릭 비에이라와 에마뉘엘 프티로 구성된 중원은 강한 피지컬과 테크닉을 겸비했으며, 왼쪽의 마크 오버마르스, 오른쪽의 레이 파를러 혹은 프레디 융베리가 넓은 폭에서 빠른 돌파를 선보였습니다. 최전방에는 데니스 베르캄프와 티에리 앙리가 호흡을 맞추며, 한 명은 연계와 창의성을, 다른 한 명은 속도와 마무리를 담당하는 이상적인 조합을 형성했습니다. 당시 아스날은 수비에서도 매우 강력한 모습을 보였으며, 백라인은 토니 아담스, 리 딕슨, 마틴 키언, 나이젤 윈터번 등으로 구성된 '잉글리시 벽'이 존재했습니다. 벵거는 이 견고한 수비 조직을 유지하면서도, 공격적으로는 기술적이고 창의적인 유럽식 전술을 입히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조합은 결국 1997-98 시즌 더블(리그+FA컵)을 시작으로, 2001-02 시즌 더블, 2003-04 시즌 무패 우승까지 이끄는 핵심이 되었습니다.
2005~2010: 4-2-3-1로의 전환과 미드필드 중심 변화
2004-05 시즌 이후, 아스날은 하이버리에서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으로 이전하며 새로운 재정적 환경에 직면하게 됩니다. 동시에 주요 선수들의 이적(비에이라, 앙리, 융베리 등)과 함께 팀은 리빌딩 국면에 접어들었고, 벵거는 이에 맞춰 전술적 조정을 단행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변화는 4-2-3-1 포메이션의 도입입니다. 이 시스템의 핵심은 미드필드의 유동성과 점유율 축구입니다. 수비형 미드필더 2명을 두어 안정감을 확보하고, 그 위에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AMC)를 배치해 창의적인 플레이를 유도하는 구조입니다. 벵거는 세스크 파브레가스를 AMC로 활용하며, 그 주위를 플라미니, 송 빌롱, 로시츠키, 나스리, 데닐손 등 다양한 미드필더 조합으로 실험을 이어갔습니다. 당시 아스날은 높은 점유율과 정교한 패스 플레이를 추구했지만, 피지컬과 경험 부족으로 결정적인 순간에 약점을 노출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벵거는 어린 유망주 중심의 전략을 통해 재정적 안정을 꾀하면서도, 기술적 축구의 철학은 유지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트로피는 부족했지만, 이 시기의 아스날은 미드필드 중심의 창의적인 전술로 많은 팬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또한 벵거는 측면 자원의 활용에도 많은 변화를 줬습니다. 로빈 판 페르시나 에두아르두 같은 선수들은 원톱으로서 움직임이 유연했으며, 왼쪽의 아르샤빈, 오른쪽의 월컷은 스피드와 기술을 바탕으로 전환 속도를 끌어올렸습니다. 이 시기의 아스날은 매 경기 당 60~70%의 점유율을 기록하며, 벵거의 점유율 중심 철학이 본격화된 시기였습니다.
2011~2018: 하이브리드 전술과 현실주의의 진화
2010년대를 지나며 벵거는 전술적인 이상주의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첼시의 무리뉴, 맨시티의 펠레그리니 및 과르디올라, 토트넘의 포체티노 등 경쟁 감독들이 각기 다른 전술로 EPL의 판도를 바꾸자, 벵거 역시 팀의 전술 유연성을 강화합니다. 4-2-3-1은 유지하되, 때로는 4-1-4-1, 4-3-3, 3-4-2-1까지 실험적인 포메이션을 다양하게 도입했습니다. 특히 2016-17 시즌에는 3백 시스템을 시도하며 FA컵 우승을 거머쥐었고, 이는 벵거가 전통적인 철학에서 탈피해 보다 현실적이고 유연한 전술을 시도한 대표적 사례입니다. 이 시기의 아스날은 수비 안정성과 공격 전개 사이의 균형을 위해 종종 수비형 미드필더를 한 명만 배치하고, 측면 윙백의 공격 가담을 극대화하는 구조를 사용했습니다. 선수 구성 측면에서도 보다 다이내믹한 전술 적용이 가능했습니다. 알렉시스 산체스, 메수트 외질, 산티 카소를라, 아론 램지 등은 다양한 포지션에서 활약하며 포지셔널 유동성을 제공했습니다. 특히 외질은 벵거 체제의 ‘마지막 10번’으로서 창의적인 공격 전개를 주도했고, 산체스는 윙과 중앙을 넘나들며 폭발적인 득점력을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벵거는 이 시기에 심화된 경쟁 속에서 전술적인 리스크를 감수해야 했고, 리그 성적은 점차 하락세를 보였습니다. 전술의 복잡성에 비해 선수단의 질적 격차와 피지컬 약점이 드러나면서 챔피언스리그 진출권 확보도 어려워졌고, 이는 결국 2018년 그의 퇴임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벵거는 끝까지 '공격 축구'라는 자신의 철학을 버리지 않았고, 전술적인 실험과 진화로 EPL 전술의 다양성을 키운 선구자로 남았습니다. 그가 EPL에 남긴 전술적 유산은 오늘날에도 많은 감독과 팬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아르센 벵거의 전술 변화는 단순히 포메이션의 변천이 아니라, 축구라는 스포츠에 대한 철학적 고민과 시대적 흐름에 대한 대응의 결과였습니다. 그는 창의성과 유기성, 기술과 공간 활용을 중심으로 한 전술을 일관되게 추구하면서도, 리그 환경의 변화에 맞춰 유연하게 시스템을 조정해 나갔습니다. 그의 전술적 진화는 단순한 기록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오늘날 감독들이 고민하는 ‘축구의 방향성’에 대한 귀중한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